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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어떻게 발생한걸까요?
소년데드풀
·2021. 5. 20. 20:58
19세기, 스페인은 여러차례 정치적 혼란, 정치적 부패,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여러 쿠데타가 있어왔습니다.
심지어 이런 쿠데타중, 쿠데타가 성공한 경우도 상당히 다수였습니다.
이러한 기조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리베라를 주축으로한 쿠데타 세력이,
알폰소 13세 왕의 인정을 받고 정권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세계 대공황이 다가오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됩니다.
알폰소 13세는 이러한 정치적 혼란에
1931년, 총선을 실시하게됩니다.
이러한 총선에서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알폰소 13세는 퇴위를 할수밖에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군부는 여러번의 쿠데타 성공을 기반으로,
다시 한번 쿠데타를 통해 권력장악을 노리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있었던 스페인 공화국은
주요 장교들을 한가한 곳으로 좌천을 보내거나,
직책에서 배제시켜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스페인 군부는 역시나
쿠데타를 언제나 준비하고있었습니다.
즉, 폭탄 심지에 불만 붙여지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극우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에서,한 경찰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분노한 경찰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스페인 주요 정치인중 하나였던,
극우 파시스트 정치인, 호세 칼보 소텔로를
응징을 목적으로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쿠데타 세력에게 빌미를 주었고,예상대로, 7월 18일, 쿠데타를 실행합니다.
그들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는것에는 실패하지만,남부 세비야와 북부 대부분을 차지하는것에 성공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후일 스페인의 독재자,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시 좌천되었던 카나리아 제도로부터 돌아오게됩니다.
당시 공화파가 많은 분파로 갈려져있었고,
이들 와중에서도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민주주의자
각각 다른 사람들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세력을 막는데에 역량을 합치는것이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었다는, 평가 역시 존재합니다.
그들이 일관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못했고,
내부적 권력 투쟁때문에 단합대신,
지속적인 내부의 투쟁에
인력소모가 컸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보수 우파 세력 역시,
그러한 분열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당파, 파시스트, 일부 자본가로 구성되어있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왕정을 복구시키는것,
혹은 기존 자본주의를 지키는것 혹은 공산주의 세력을 분쇄하는것,
각각 다른 목표로 분열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코가 있었습니다.
그는 빠른 시일내에 스페인 군부내에서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였고,
반공과 교회 권위의 강화를 강하게 주장하며,
대부분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하게됩니다.
이러한 통합적인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공화파 정부를 압박할수 있었으며,
더불어 이러한 압박은 단순 프랑코 개인의 역량 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그들에게직접/간접적으로
군사적 지원 혹은 경제적 지원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중에 하나가,
독일에서 의용병으로 참전하였던 공군부대,
콘도르 군단에서진행하였던 사건입니다.
많은 민간인이 사망하게된,
게르니카 폭격이바로 그러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 무솔리니 역시
5만명의 군대와 각종 군수물자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공화파 정부 역시 여러 지원을 받은 세력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세력중 하나였던 소련과 코민테른이 그러한 지원을 주로 진행하였습니다.
스탈린은 스페인에 각종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각종 무기와 병력을 스페인에 수송합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가까웠던 독일과 이탈리아와는 달리,
소련과 스페인 사이의 거리는 멀었기 때문에,
그러한 지원은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공화파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력들은 파시스트 역시 경계하였으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 역시 더더욱 경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과정에서
스페인에 지원을 하려고 하였던
프랑스의 앙드레 레옹 블룸 총리의 계획을 저지하거나
방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레옹 블룸은 공식적인 지원은 포기하게됩니다.
그러나, 당시 공식적 정부의 지원은 몰라도,
반 파시스트 운동가와 지식인들,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로 구성된
일명 국제여단이 존재하였는데요.
이러한 국제여단은 상당히 활발하였습니다,
오는날 저명한 이들중 하나인,
조지 오웰, 어거스트 허밍웨이, 로버트 카파와 같은 이들 뿐만아니라.
차기 독일의 총리가되는 빌리 브란트 역시이러한 국제여단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것은 당시 국제여단이
단순 민간지원수준 이상이였음을 반증합니다.
이러한 국제여단은 무려 4만명이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였기때문에,
독일이나 이탈리아에게 공식적으로 지원받은
정규군에 비해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공화파 세력은 상당히 패색이 짙어지고,
마침내 주요도시중 하나인, 바르셀로나가 쿠데타군에게 함락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쿠데타 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하게됩니다.
결국 3월, 그들의 마지노선이였던 마드리드 마저 함락당하고,
프랑코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자신의 승리를 공식화 합니다.
이후 프랑코는 반 프랑코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데요,그들은 이미 세비야에서 약 8000명, 코르도바에서 약 10000명,바다호스에서 약 6000명을 학살합니다,
아까전과 같은 게르니카 폭격은 독일 콘도르 군단에서 자행한것이지만,그러한 것은 역시 스페인 쿠데타군의 암묵적 허용이 있었기 때문에,가능한 것이였습니다.
정확하거나 확실한 통계는 존재하지않지만,프랑코가 전후 3만명~20만명 가량을 공화파로 몰아 처형했다고 알려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50만명 가까이의 스페인의 공화파 지지 세력이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기도합니다.
그러나 몇년뒤, 프랑코를 지지하였던 독일 나치당과 그 휘하 세력이 프랑스를 점령하였기 때문에,그들의 운명이 비참했음을 모두 알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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