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으로 초래된 30년 전쟁

소년데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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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1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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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그림

저번 글에선, 종교개혁과 그 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해당글 이러한 과정으로 독일에는 농민 전쟁까지 벌어졌고,많은 혼란을 불러왔습니다.

 

그러한 대표적 예시는 30년 전쟁인데,당시 서유럽 국가들의 대부분이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에 관한 그림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에의해 개신교 진영의

루터교회가 인정받게되었고, 종교를 통해 이뤄진 분쟁들이 상당수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영주들은 개신교를 믿을지 혹은 가톨릭을 믿을지 선택할수있었고,

이를 원치않는 이들에게 이주의 자유까지 부여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이후, 영주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루터의 개신교 외에 다른 개신교가 확산되는것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독일 농민 전쟁을 묘사한 그림
왜냐하면, 독일 농민전쟁의 경우, 농민뿐만 아니라 영주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이러한 과정들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리고, 전쟁이후 이러한 상황에

개신교와 가톨릭 서로 둘다 이러한 화의에 의문을 가졌고,

 

점점 다시 반종교개혁 정책/운동이 생겼고,

이러한 운동을 막기위해, 개신교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와 손을 잡게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가 이들과 손을 잡은이유는,

그들이 가톨릭 진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합스부르크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후 가톨릭 진영에서는 가톨릭 연맹이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마티아스와

그 황위 후계자로 거론되던 페르디난트 2세는

 

당시 반 종교개혁 정책을 주도하였고,

결국 갈등은 지속적으로 커져나갔으며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황제의 대리인들을 개신교신자 영주들이수상실에 쳐들어가 창문밖으로 던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황제로 추대되었던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개신교 연맹은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황제로 올리게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 영주들은 프리드리히 5세의 정통성을 의심했고,결국 황제에게 반기를 든 전쟁은 사실상 패배하게됩니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자신이 본래 영주였던 팔츠지역으로 돌아가는데,

 

당시 황제는 그의 팔츠지역까지 점령하여다른 영주들에게 나눠줄것을 계획했고,

 

프리드리히 5세는 유럽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이때 덴마크지역의 크리스티안 4세가 이러한 과정에 큰 관심을 가졌고,독일 북부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점령한 지역에 과도한 과세를 진행하고,심각한 관세를 적용하였기때문에,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규탄받았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초상화

이때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라는 장군이 등장하는데,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였으며,

 

그러한 침략을 막기위해 신성 로마제국 황제로부터

계약을 받고 독일 북부에 출전하게됩니다.

 

그는 그의 군대에게 약탈을 금지하였고,

다른 용병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급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결국 약탈을 불러옵니다.

 

당시 전쟁에서 많은 인구가 희생당한이유는

이러한 군대의 약탈에서도 비롯되었습니다.

 

결국 크리스티안 4세는 최종적으로 패배하였고,

대부분의 북독일지역을 다시 통제하게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결정적으로 실수를 하는데요,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이전으로 모든 정책과 재산을 돌리는

복구령을 시행하였는데요.

 

이러한 상황은 개신교 지도자들, 가톨릭 지도자들,

둘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게되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그러나 이러한 복구령 이후,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가 개신교 연맹에게

다시 동맹을 요청하여, 다시 한번 북독일 지역에 상륙하게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30년 전쟁이 단순히 종교적 전쟁을 넘어경제적/정치적 이권 북유럽과 중부유럽의 패권에대한 투쟁임을 알수있습니다.

 

구스타프 2세의 군대들은 점점 불어나고, 개신교 진영및 프랑스에게 까지 지원을 받게됩니다.

당시 브라이텐벨트 전투의 주요 전략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의 결정적 승리로,독일 대부분의 지역을 통제하에 두게됩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2세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를 느껴,발렌슈타인에게 무제한적인 권력의 총사령관을 맡겼습니다.

뤼첸 전투의 전략도

그러나 뤼첸전투에서 발렌슈타인은 패배했지만,

구스타프 2세가 사망하게되면서,

개신교 진영에게 역시 상처뿐인 승리로 남게됩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이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화평을 준비하자,

 

페르디난트 2세는 분개하여,

그를 반란모의 혐의로 체포하고 처형하게 됩니다.

페르디난트 3세의 초상화

이후 페르디난트 2세의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3세에게 총사령관 직을 맡기게되었고,

이후 상당히 많은 승리를 거두게됩니다.

 

결국 개신교 영주들은 결국 프라하에서 합의를하게 되는데요.

 

복구령을 40년간 보류하기로하며,

스웨덴과의 협력을 중지하게됩니다.

 

결국 이러한 전쟁은 신성로마제국과 페르디난트 2세의 승리로 마무리될것 같았으나,

 

그러나, 이러한 신성로마제국의 상황에 프랑스는 탐탁치않았고,

기존에 진행하던 전쟁에 간접적 지원 대신 직접적 참전을 선언하게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지속적인 전쟁으로,

농민들과 시민들은 약탈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양측 모두 전쟁에 대한 피로도와 반대에 시달리고있었으며. 

 

황제로 즉위하게된 페르디난트 3세는 총사령관을 맡으며,

이러한 전쟁의 실상을 잘 알기때문에, 평화조약을 주도하였습니다.

근대외교의 시작, 베스트팔렌 조약

결국 30년 전쟁의 종지부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게됩니다.

 

이제 대부분의 개신교의 종파가 인정되었고.

이제는 각 개인의 종교의 자유 역시 인정되었습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을 약화하고,

중앙집권화를 방해하게되어,

 

통일된 독일의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데,

방해하게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의 통일과정과

통일된 독일의 민족국가에대해 궁금하시다면

 

이 글에서 확인 가능하십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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