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최초로 공화정이된 사건, 잉글랜드 내전과 올리버 크롬웰
소년데드풀
·2021. 5. 21. 21:00
1625년, 제임스 1세 사후,
영국의 새로운 군주 찰스 1세가 즉위하게됩니다.
그는 강한 왕권을 밀어붙이며,
당시 영국 의회와 큰 갈등을 겪는데요.
영국 의회는 당시 현대와는 달리
정기적으로 소집되지못했고, 큰 권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금이라는 또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의회는 지역 유지/명망가들인
일명 젠트리가 주축이 되었는데요.
새로운 세금을 만들때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건 당연하고,
그들의 동의 없이 제대로된 세금징수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병사를 민가에 무료로 숙박하게 하고 군법을 일반 국민에게도 적용했으며,
그럼에도, 자신은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찰스 1세의 해외 원정으로 인해,
국고가 점점 바닥나기 시작하자, 결국 1628년 5월,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게됩니다.
당시 의회는 권리 청원을 제출해
11개의 항목을 요구했습니다.
'세금을 국왕 마음대로 징수하지 말 것'
'이유 없이 체포하거나 투옥하지 말 것'
'민폐를 끼치는 군대를 각 지역에 배치하지 말 것'
'군사 재판을 금지할 것' 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국왕은 겉으로는 권리 청원을 받아들이는 척 하였으나,
의회의 요구 사항을 이행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찰스 1세는 의회 활동 자체를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탄압했습니다.
불만을 토로한 사람은 런던 광장에서 처형되거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1629년 1월, 급기야 찰스 1세는 강압적으로 의회를 해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1640년까지 무려 11년동안 의회 없이 절대적인 왕권을 통해 통치하게됩니다.
한편 찰스 1세는 성실 재판소와 고등 종무관 재판소를 설치해
청교도를 탄압하면서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당시 영국은 영국 국교회인 일명 성공회를 통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이는 영국 젠트리나, 시민들에게있어서도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찰스 1세는
온갖 세법을 만들어 국민에게 여러 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당시 중요 물품중 하나였던 담배, 소금, 술, 석탄 등의 전매권을
왕실로 하여금 독점하여, 어마어마한 차익을 보았습니다.
그 바람에 당시 한창 발전하던
영국의 상공업의 발전이 주춤거렸고,
그 결과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습니다.
곳곳에서 세금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찰스 1세는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거나 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찰스 1세는 해외원정을 줄이기위하여
오랜 숙적이였던 프랑스/스페인과 화해하였습니다.
전매권 등 각종 세금을 도입하였으나,
의회의 도움없는 세금징수는,
상당히 제한적인 재정으로 진행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강렬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오히려 진압군이 격파당하고 잉글랜드 지역인
뉴캐슬을 점령당하기까지합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에게
일정 비용을 지급하고, 몇가지 약속을 하며
겨우 반란을 잠재우게됩니다.
결국 찰스 1세는 1640년,
다시 한번 의회를 소집하게되는데요,
그러나 그 의회는 찰스 1세가 원하던
세금과 관련된 논의 대신,
각종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결국 찰스 1세는 이러한 의회를 해산시키게됩니다.
이 의회는 짧은기간안에 해산되었기때문에,
역사적으로는 "단기 의회"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당시 재정은 너무나 부족하였기 때문에,
찰스 1세는 다시한번 의회를 소집하는데,
이것을 "장기 의회"라고 부릅니다.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정책을 비판하고,
찰스 1세의 심복인 토머스 웬트워스 백작을 사형하고.
3년의 정기적 의회 소집과,
의회의 동의에 따른 의회해산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결국 찰스 1세는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1942년, 군인을 이끌고 의회로 쳐들어가게됩니다.
이 사건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열로
잉글랜드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게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대부분의 농촌지역은 왕당파를,
도시 지역에서는 의회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컸었고.
더불어 찰스 1세의 군대가 초기에는 우위를 점했으나,
의회파와 후일 호국경이 되는 올리버 크롬웰이
철기병을 중심으로한 정규병인
일명 "신형군"을 조직하여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게됩니다.
결국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나고,
찰스 1세는 감금당하였지만.
의회가 지속적으로 분열되고,
분쟁을 일으키자 찰스 1세는 이를 노리고
다시한번 왕당파 중심의 내전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봉기는 실패했고,
올리버 크롬웰은 왕을 가만둘수 없다고 생각하여,
찰스 1세의 사형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체포하거나
혹은 의회로 오는것을 막아버리고, 왕에대한 재판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사형합니다.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한 잉글랜드에서는,
최초로 공화국이 되었는데요.
그러나 크롬웰과 그 의회는
지속적으로 아일랜드를 의심했는데요.
왜냐하면 기존의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 비해,
아일랜드는 가톨릭 성향이 강했으며, 또한 그러한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있었습니다
왕당파들이 다시한번 재기를 꿈꾸기위해
아일랜드를 이용하지않을까,
특히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속적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1649년,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침공했는데요,
당시 크롬웰은 아일랜드에서 엄청난 학살을 진행합니다.
크롬웰은 이러한 학살에 대해
나는 이것이 이 야만인들에 대한
신의 정의로운 판결이라고 확신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지속적으로 아일랜드의 학살을 이어나갔고,
이때문에 아직도 아일랜드에서는 올리버 크롬웰에대한
역사적 평가가 좋지않습니다.
그리고 1년뒤인 스코틀랜드에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군주로 옹립하고자 하였는데요.
당시 아일랜드에서의 진압을 그만두고,
스코틀랜드로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크롬웰은 같은 개신교도가 다수였던 스코틀랜드에서는
학살을 최소화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러한 반란들을 제압한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종신의 임기를 보장받았고,
왕과 같은 권력을 보장받았습니다.
심지어 의회는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거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그가 생각하는 청교도적 윤리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무조건적 성경 근본주의적 행위를 하였으며,
일요일의 노동을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라는 말이 없었기에,
그는 크리스마스에 쉬는것을 금지하였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물품들을
시민들로부터 빼앗아 갔습니다.
당시 그러한 행정을 위하여,
잉글랜드 전역을 15개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마다 자신의 장군을 보내어 통치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통치는 상당히 강압적인 통치를 보여주었습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은 사망하고,
호국경의 지위는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승계하였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하였던 강압적 통치로,
그에대한 여론은 바닥을 기었으며,
그는 올리버 크롬웰만큼의 권력이나
군대가 없었으므로, 호국경의 지위에 오른지 1년후,
스스로 그 자리에서 하야하게됩니다.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왕정복고를 위하여
찰스 2세를 다시한번 불러일으키게되고,
찰스 2세는 아버지인 찰스 1세에대한
복수를 위해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하게됩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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