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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과 독일제국 통일사
소년데드풀
·2021. 5. 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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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의 통일이 선언됩니다.
이로인해, 독일은 최초로 통일된 독일민족국가를 형성하게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왜? 독일은 최초의 통일 민족국가를 18세기말에나 갖추게되었고,
왜 이것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통일을 선언한걸까요?
1871년의 독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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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지역은 여러 영주들로 이뤄진,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신성로마제국으로 묶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통일된, 중앙 집권적인 제국이 아니라.
다양한 영주들을 묶어 만든 허수아비 제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은 근대에 다달으며,
근대 계몽주의/민족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여러 계몽군주들이 탄생하면서.
이러한 신성 로마 제국의 불필요함이 더더욱 강조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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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아니다"
라고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 혁명이후 나폴레옹의 침략에의해 해체되었고,
계몽사상과 민족사상이 유입되며,
통일된 독일어권 민족의 국가를 열망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독일어권 민족들의 통일된 국가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유럽의 세력구조상,
통일된 민족을 통한 제국이 하나 더 생긴다는것은
기존 열강들에 있어서, 경쟁국가가 생긴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국가들에게 당연히 위협이 될것임이 분명했고,
이러한 두려움은 곧 각 열강들의 통일에대한 부정적 의견에
큰 역할을 하게되었습니다.
더불어, 당시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독일 국민에 비해,
당시 독일의 각 지방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것을 두려워하며
오히려 통일에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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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폴레옹을 완전히 짓밟은 후 이뤄진
빈 회의에서는,
각 영주들과 권역을 묶어
약 41개의 독립적인 정치적 단위로 결성된 독일 연방이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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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독일연방은 통일된 독일민족의 국가라보긴 힘들었고,
단순히 느슨한 형태의 연합에 가까웠습니다.
즉 신성로마제국과 같이 쪼개진 영주들의 연합에 비해서
상당히 진보된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독일의 계몽사상가/민족사상가,
여러 독일의 국민들에게는
바라던 것 그 이하였다는것입니다.
당시 빈회의로 이뤄진 빈체제에 의하여
당연히 민족주의적 행위/운동은 정체되었습니다.
단순 그 국가의 민족에 있어서는 좋을지 모르겠으나,
혹은 그만큼 효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기존 국가를 운영하던 그 기득권 정치세력들에게는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였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1848년, 빈체제로 인한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과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이뤄진 전 세계적인 혁명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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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많은 시민들과 국민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주력으로,
독일의 시민들은 자의적으로 500여명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일명 "국민의회"를 개회합니다.
이러한 국민의회에서는 차기 통일 독일 민족을 위하여
여러가지 논의를 하였는데요,
당시 주된 논의 대상은
소 독일주의와
대 독일주의간의 대립이였습니다.
당시 독일연방에는 위의 지도와 같이,
상당수 이상이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소 독일 주의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통일을 이루는것,
대 독일 주의에서는 그러한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영토를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는것에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이에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냈었고,
결국 이러한 내용은 소독일주의로 결정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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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주축으로
통일된 독일제국을 설립하기로 합의를 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것이 결국 허수아비 황제를 만들것이라고 예상하며,
이러한 추대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된 독일 민족국가에대해서
반대하는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로이센은 이후로 기존 연방에서 프로이센과 영향력이 깊은
북부영토를 중심으로, 28개 단위의 정치단위를 통합하여,
자체적인 헌법에 기반한 통일국가를 만들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스트리아는 그러한 문제에 동의하지않았고,
지속적으로 프로이센의 행위를 방해하며,
오스트리아 중심의 독일 통일을 준비합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는 당시 러시아와 상당한 밀월관계에 있었기에,
프로이센은 이러한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감정의 문제가 커졌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을 주장하는 여론이 커지게되었는데요,
그러나, 당시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며
이러한 전쟁을 반대하던이가 바로, 비스마르크였습니다.
당시 독일이 전쟁을 하는것은 당연히 무모한 선택이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밀월한 관계를 맺고있고,
이때 섣불리 전쟁을 선포했을때,
독일은 필요이상의 많은것을 잃게될 확률이 높기때문이였습니다.
결국 국익에 도움되지않는다고 여겨지게 되었고.
이러한 의견은 당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입장과도
동일했기 때문에,
그는 정치적입지가 커지고, 프로이센에서 기용받게됩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 대사로 파견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입지 확장을 막고,
프로이센의 이익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간의 관계가
밀월관계에서 점점 나빠지던중,
비스마르크는 이를 재빨리 이용하였고,
러시아의 잠재적 지원을 받게됩니다.
결국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철혈에대한 연설을 진행하게됩니다.
결국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는
지속적으로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방해하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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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퇴출하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함으로서, 전쟁을 시작합니다.
비스마르크의 성격대로, 역시나 전쟁은 오랜기간이 아니라,
단기간에 완전한 통일 대신,
북독일 일부 지역의 통일로 합의하고,
외국 열강의 개입을 빠르게 차단한것입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막아버린거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편에섰던 독일 남부지역을 응징하고
싸우는것 대신, 그들을 옹호하고 지키는것을 중심으로,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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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를 결정하는데에 있어서,
당시 프로이센 출신의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이 스페인의 왕위를 제의받고,
여러 외교적인 상황이 이어가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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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기존의 프로이센과의 외교에서
무리한 요구를 이어나갔고,
결국 이러한 무리한 요구는 전쟁으로 까지 이어갔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혹은 영국의 개입을 바랬으나.
이미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자체를 묵인하였으며,
일전에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던
독일 남부 독립국가들 역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프로이센 측에 합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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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결국 고립되고,
빠르게 독일에의해 점령되기 시작하고,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결국 남부 독일 국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시대의 흐름속에서 독일과 통일하는것에 합의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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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최초의 통일 독일민족국가를 형성하게됩니다.
이후는 세계 1차대전의 전개과정과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글을 쓸 것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함께하는 세계사 유튜브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
또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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