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전개과정

소년데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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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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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4.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하여

전국의 대규모 시민에게 확대된
반독재투쟁이자 혁명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3.15 부정선거에서 시작됩니다.

 

제 4대 대통령선거에 나온 이승만

 

당시, 이승만 정권(자유당 정권)은
제 4대 대통령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대통령선거에는

자유당 이승만과 민주당 조병옥

 

부통령선거에는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 장면 후보가

서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조병옥후보는,

갑작스러운 심장병 악화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려다,

사망하게되었기에,

 

이승만후보가 자동으로 당선되었으나,

 

문제는 부통령선거였습니다.

 

이전의 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후보인

장면이 당선되었기때문에,

 

이번 부통령선거까지 장면이 이기고,

고령의 이승만이 사망이라도 하게된다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정권은

민주당에게 넘어가기때문에,

자유당 정권은 말 그대로
위기에 휩싸이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부통령 선거에 나온 장면

 

그래서, 제 5대 부통령으로
장면이 되는것을 막기위해,

결국 자유당정권은 부정선거를 진행하게됩니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이죠,

이러한 부정선거가 이뤄진 방법은 바로,

 

투표함 바꿔치기, 뇌물 살포, 3~5인조 투표, 등등...

 

각종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했습니다.

 

당시 3월 15일 민주당 마산시당 앞에 모인 시민들

 

당일날,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의심했고,

민주당 마산시당앞에 모이거나,
집회나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결국 3월 15일,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9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사망자들이 실종자들로 처리되었으나,

이것은 자유당 정권과 경찰들이 감추기위하여 일어난 일 이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자유당 정권과 정부측은 지속적으로

"이것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다." 와같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4월 11일, 결국
김주열 열사 등 많은 사망자들의

시신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무대(청와대)로 향하는 학생들의 모습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고등학생, 대학생 등,
많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나섰습니다.

 

결국 미국도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되었고,
이승만은 하야선언을 하게됩니다.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결국 이승만은 하야이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해버렸고,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가 이뤄졌습니다.

 

곧 4월 19일,

4.19 혁명 기념일이 돌아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모든 민주화 열사분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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