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소년데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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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20.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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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를 주도했던 표트르 2세

러시아의 서구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던, 표트르 대제의 시대 이후로,

러시아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러시아 내의 자유주의자들은 노력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계몽군주 사상을 받아들이던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여제도 나름 유럽식 계몽군주 사상을 받아들이며,

많은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왔으며, 서구화와 자유주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점점 성장해나갔죠.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표현하는 한 그림

심지어 1825년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청년장교들이

입헌군주제 실시를 목표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즉 러시아의 자유주의 세력은 나름 오랜시기를 걸쳐 성장한것뿐만이 아니라,

각종 개혁과 자유주의 세력의 시도가있었음을 알수있습니다.

 

크림전쟁의 한 장면

영향력을 키우기위해 흑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남하하던 러시아는,

각국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지지받지못했고,

 

결국 1856년! 오스만과

여러국가의 연합국에의해 크림전쟁에서 대패하게됩니다!

 

러시아는 50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내었고,

결국 러시아는 흑해와 크림반도의 패권을 잃게되기까지 이릅니다.

농노 해방령을 발표한 알렉산드르 2세

제정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고,

 

지주에의해 고통받고 핍박받던 여러 농노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러시아의 경제가 대격변하게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각종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금융과 인프라 각종 시스템의 개혁과 발전이 촉진됩니다!

 

그러나 "귀족"으로 부터 해방된 농노들은

"토지상환금"에 종속되었으며,

 

당시 산업혁명이 이뤄지고

많은 가내수공업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는 확실히 자유주의 세력을 필두로한

각종 개혁이 이루어졌음을 알수있습니다.

 

더불어 당시 제정 러시아는

타 서구권 국가들의 각종 정치개혁와 자유보장에도 불구하고,

 

기본 봉건제를 타파하지않고

지속적으로 왕정을 유지하였기에, 자유주의 세력뿐만아니라

민중 역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있기도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알렉산드르 2세가 급진 개혁세력에의해 폭사 당했을 정도로,

당시의 개혁파 자유주의자 세력은 상당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사후,

개혁파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이뤄진 개혁과 시도들은 물거품이 되버립니다.

알렉산드르 2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2세의 대부분의 개혁을 철회하고,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1891년, 러시아는 역대 최악의 가뭄을 마주하고,

식량난에 굶주리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과중한 노동시간으로인해 고통받고있었죠.

 

일부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되었으며,

강력한 반제정주의자로 탄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민중의 삶은 피폐해지고, 민중의 불만은 가중되어갔죠.

알렉산드르 3세의 후계를 이은 니콜라이 2세

이후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고,

여러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은

각종 개혁법안을 황제에게 제출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거나

묵인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행보를 이어나가는,

전제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것이죠.

 

이와중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은

더더욱 조직을 정교히 갖추기 시작합니다!

볼셰비키, 레닌
맨셰비키, 율리 오시포비치 마르토프

러시아의 사회주의정당 사회민주노동당은

당시 당의 두 분파는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와

이와는 다른 "맨셰비키"로 구성됩니다.

 

레닌과 각종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각종 노동자를 교육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홍보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이

발전된 산업화와 자본주의였기에,

 

자유진영과도 연대해

공통의적인 전제정치를 타도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러일전쟁을 나타내는 사진중 하나.

그런데,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가 대패를 거듭하고있었습니다.

 

그만큼, 전쟁으로인한 동원과 세금에의해서도

민중들의 여론은 좋지않았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회를 잡고

차르에게 각종 정치개혁을 위한 결의안을 요구했으나,

 

차르는 교묘히 중요한 사안을 피해나가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릅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나타내는 사진중 하나,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노동자들과 가폰신부는

성당대신 황궁으로 찾아갑니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 요구를 위해

차르를 찬양하는 노래와 성가를 부르며

 

노동자들은 차르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고,
결정적으로 기병대를 출격시켜 그들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그들이 믿고있던 국가의 어버이였던 차르는,

민중의 목을 배고 총으로 난사해댔습니다.

 

민중은 분노했고,

각계각층의 지식인, 노동자,심지어 군인들까지

이러한 혁명에 동참하기까지합니다.

 

포템킨 선상반란사건 영화의 한장면

그리고 더불어, 러시아의 전함이였던,

포템킨함의 수병들은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을정도로

열악한 환경속에 있었고, 결국 선상 반란이 일어나기까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란이였지만,

그것의 의의는 그렇지않았습니다.

 

소련 건국에 있어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라고

부를정도로 영향력이 큰 사건이였고,

제정 러시아 몰락의 시발점이였습니다.

 

결국 차르는, 각종 보통선거제 ,

두마설치, 각종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개혁의 일환인 "10월 선언"을 하게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만족하게되었지만,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레닌 역시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나갔고,

 

이때 4월 테제를 선언하게됩니다.

 

당시의 사회민주노동당 역시 각종 무력혁명을 준비했고,

노동자들에게 총과 칼을 나눠주게됩니다.

 

7월,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정 러시아의 군대에의해 진압되고맙니다.

 

레닌 역시 외국으로 망명하게됩니다.

 

차르는 2차례나 의회를 해산하였지만,

당시 의회 총리 스톨리핀 총리

스톨리핀 총리를 주도로

지속적으로 각종 개혁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은 그리 쉽게 재워지지않았고.

여러 정치적인 상황으로 지지를 잃고말았으며,

그는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하게됩니다.

 

그렇게 개혁의 바람이 멈추게되고,

다시 군대와 노동자, 그리고 지식인들은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되었고,

결국 농민과 노동자, 군대와 지식인들은 다시 잠시 통합하게됩니다.

1차세계대전의 러시아군의 단체사진

초반에는 몇차례 승리 했으나,

결국 지속적으로 패배를 거듭했고

 

대중들은 다시 무능한 차르와 고위층을 비난하게됩니다.

또한 차르는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으며 황궁을 떠나게되는데,

 

당시 라스푸틴과 황후가 내정을 휘어잡았는데,

각종 헛짓거리들을 하고 황실에대한 성추문이 이어지자,

 

황실의 권위는 추락하게됩니다.

결국 러시아는 다시한번 노동자와 봉기에 휩싸이고,

 

러시아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하거나

맨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하고,

 

몇몇 군대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기까지 하죠.

 

제정러시아는 지속적으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하지만,

점점 군대는 정부에대한 반감이 이어졌고.

2월 혁명의 사진

2월 혁명의 세는 꺾이지 않았고, 결국 군대마저 정부에 등을 돌리고

반란을 선언하게됩니다.

 

결국 군대와 민중들은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시설을 점령하기까지에 이릅니다.

 

결국 정부는 붕괴됬고,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임시정부를 선언하게됩니다.

 

더불어,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자들과 여러 세력들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연합회"를 구성하게됩니다.

 

이때, 많은이들의 지지를 받았던

맨셰비키가 이의 주축이됩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하였습니다.

러시아 제정은 역사속으로 물러납니다.

 

대부분의 민중과 군대는 소비에트의 편이였고,

임시정부와 협력하기로 하였으며,

 

독일의 지원을 받은 레닌은 조국 러시아로 돌아옵니다.

4월 테제를 선언하는 레닌

레닌은 결국 볼셰비키와 함께 임시정부와의 손절과

다시 한번의 폭력 혁명을 요구하였고,

 

그는 뛰어난 연설능력으로 다시한번 자신의 세력을 규합합니다.

그러나 아직 임시정부는 정정했고,

 

맨셰비키와 임시정부는 레닌의 체포명령을 내렸고,

레닌은 다시한번 해외로 도망가게됩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지속적으로 조직을 결집시키기 시작했고,

레프 트로츠키의 모습

점점 임시정부는 개혁동력을 잃어가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를 외친 사회민주당에는

레닌을 지지하던 트로츠키가 집권하게됩니다!

임시정부의 수장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

당시 임시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라브르 코르닐로프라는 장군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상트페테르크부르크에 다시 수도에 군사를 파견하기로했지만,

이것은 쿠데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있었고,

 

그를 결국 코르닐로프를 해임시켰으나,

그는 코르닐로프를 막을만한 병력은 없었고,

 

그러한 병력을 가진 볼셰비키에 도움을 청했고,

볼셰비키세력은 수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는데 성공하고,

 

볼셰비키는 여러지역에서 더더욱 많은 영향력을 얻는데에도

성공하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을 얻는데에는 단순히 볼셰비키의 정치적 영향력뿐만이 아니라,

1917년, 동부전선 공세로 인해 사실상 전황은 독일에 기울어있는 상황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지속적으로 휴전협정 체결을 거부하고

 

민중들을 죽을수밖에없는 죽음의 늪에 지속적으로 동원하여

전선에 계속 투입하니, 민중들의 불만이 안커질수야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민중의 요구를 잘 알았던 볼셰비키는

"즉각적인 휴전"을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볼셰비키들은 부르주아 의회민주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부를 세워야한다는 이념적 당위성도 있었던것이죠.

 

특히 이에 주도적이였던

레닌은 당장 봉기를 요구하는 회의를 소집하였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

 

레닌은 지속적으로 볼셰비키의 반란을 선동했고

결국 혁명을 일으키게됩니다!

군중들의 앞에서 호소하는 레닌의 모습

이것을 10월 혁명이라고합니다.

 

맨셰비키는 결국 임시정부의 편으로 감으로서,

적백내전(러시아내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장악한곳들은

상트페테르 부르크와 모스크바,

몇몇의 작은 도시와 거점들밖에 존재하지않았습니다.

 

심지어 내전 초기에는 우크라이나, 카자크 등 각종세력들은

독립은 선언하는 동시에, 백군(반 볼셰비키 군)에 합류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맞서싸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볼셰비키 군)이 강제로 무장해제를 하려고하였다가,

 

역으로 그들이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최악의 상황을 마주합니다.

 

더불어 협상국은 백군에게 대부분의 물자를 넘겨주어서,

적군의 상황과 전세는 좋지않았습니다.

 

이에 적군은 백군이 다시한번 제정을 복귀시킬것에 두려움을 가져,

황제를 포함한 일가를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191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남향으로 거의 60km 앞까지

백군이 진격해 모스크바를 함락당할 위기에 쳐했으나,

 

적군은 이를 반격해내는데 성공하게됩니다.

 

백군의 저항은 지속적으로 거셌고,

적군과는 달리 백군은 지휘체계, 물자, 기술적으로나 우세했습니다.

 

적군은 레프 트로츠키를 총사령관으로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징병제를 실시,

병사들을 획기적으로 늘렸으며.

 

제정 당시의 장교들을 무차별로 영입하며,

지휘체계를 정비하게됩니다.

 

백군 역시 연합국과 여러국가의 지지와 더불어

국내의 반 볼셰비키군을 지속적으로 재조직하며,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를 압박해오기도 하였습니다.

 

적군의 일방적 우세는 아니였습니다.

 

심지어 기존의 백군 뿐만아니라,

무슬림 성향의 반군들이 바스마시 운동을 벌이기도하였고,

 

여러 민족주의와 각종 산발적인 반 볼셰비키 반군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하실수있는 관련 영상을 준비해봤습니다.

보시면 잘 이해되실겁니다.

 

그러나 결국 약 1930년대 초중반, 적백내전에서

여러번의 불리했던 전황을 극복하거나,

여러가지 상황을 역전시켜 나가며,

 

또 여러 산발적인 반란마저도 이어가며.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는 공식적으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이렇게 러시아의 혁명은 끝나고,

새로운 세계최초의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탄생하게됩니다.

소련의 국기

저 역시도 완전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유튜브 채널 "지식한잔"님과 "함께하는 세계사"님의

러시아 혁명사와 관련한 영상을 많이 참고했고요,

 

자료조사중에 재밌는 사진도 발견했습니다~!

1920년,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포착된 우측의 태극기,
레닌과 함께 소위원회활동을 하는 한국인 사회주의자 박진순

당시 소련속에도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모습들이 남아있는것을 확인할수있습니다.

 

혹시 저 역시도 실수를 할수가있으니,

잘못된점은 많은 지적바랍니다!

또 댓글이나 공감도 많이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글은 아마 프랑스 혁명 혹은 신해 혁명이 될것같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인분의 지적으로 수정된 사항

 

[크림전쟁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의 행보 추가]

[포템킨 선상반란 추가]

[10월 혁명의 주요사안중하나, 독일과의 평화협상 추가]

[적백내전 당시의 디테일추가 및, 오류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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