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집권할수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소년데드풀

·

2021. 2. 19. 12:01

반응형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

여러분은 가끔,

 

"아무리 당시 독일 정치인들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히틀러 같은 사람이 정치인이 될수있었던거지?

왜 과반은 아니어도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거지? "

 

라는 생각을 많이 하실것같습니다.

 

저 역시도 이 점에 관해 많이 궁금했고,

 

쉽게 알아보면 그냥 "당시 좌우파간의 갈등이 극심하게 달해서"라고 할수있겠지만

 

제대로된 사례를 알아보면 여러분이 더 자세하게,

그리고 잘 알수있으실것이라고 생각하실것같아서,

 

나름 당시 독일 현대사로 글을 써보려고 이렇게 시작합니다.

킬 군항에서 파업을 선언한 수병들

당시 1919년,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사실상 확정된 상황에서,

당시 전쟁터로 나간다는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죠,

 

특히 당시의 출격 명령을 받은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게됩니다.

 

파업을 선언하게 된거죠.

 

이것을 이어 당시 전쟁물자로 각종 세금과 군부의 압박에 못버틴 독일의 민중들도

파업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공산주의 기초단체인 "소비에트"

우리나라로 해석하자면 평의회인데, 공산주의 성향의 평의회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노동자나 군인들이 직접 조직한 자치기구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당시 독일의 도시였던 킬(Keil)은 사실상 이러한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들어갑니다.

 

결국 독일의회는 공화국을 선언하고,

제정은 몰락하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독일 11월 혁명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당시에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공화국의 전복을 꾀하는 독일 바이에른에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립되기도합니다.

 

이어서 당시 11월 혁명이후 독일 공산/사회주의의 거두들이 석방되기에 이르는데요,

로자 룩셈부르크, 당시 독일 공산주의 주요인물
카를 리프크네히트, 당시 독일 공산주의의 주요인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흐트는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였습니다,

선거를 통한 집권에는 그닥 관심없는,

 

사회주의 민중 봉기를 통한 혁명을 통한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주요 인물이였죠.

 

이들은 기존의 혁명을 거부하는 사민당을 탈당하고

독일 공산당을 설립하게됩니다.

 

이후, 공산당의 주요조직인 스파르타쿠스단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봉기를 일으키기 까지합니다.

당시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

그러나 당시 공산당은, 결국 세력적으로도 부족하였으며,

주요 세력이였던 군부의 일부를 포섭하는데에도 실패하여,

 

실패로 돌아가기에 이릅니다.

 

이후로 기존에 설립되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도 붕괴 되었고요.

 

즉 당시 공산주의의 주요 인물들이였던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독일을 틈타

폭동과 혁명봉기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화를 이루려고하였으나,

 

결국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정,재계 뿐만아니라 민중들에게까지

"공산주의가 독일을 위협한다!" 라고까지 여겨지며

 

당시 독일 민중들은 혼란스러운 독일의 상황을 마주하게됩니다.

 

이뿐만이 아니였습니다! 우익 군부 세력역시 혼란스러운 독일을 마주하였습니다!

카프 폭동의 주동자중 한명 발터 폰 뤼트비츠
당시의 주동자중 한명, 볼프강 카프

1920년, 군부와 우파들은 공화국화된 바이마르 공화국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전의 공산당과 각종 사회주의자들의 봉기에

더더욱 이것에 탐탁치않은 시각을 보였습니다.

 

이에 볼프강 카프를 주도로하여,

군부의 일부였던 발터 폰 뤼트비츠는

일명 "카프폭동"을 일으키게됩니다.

 

그러나 이 폭동은 결정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못하였고,

독일 전역의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당시 공화국 정부와의 협상으로 자진 해산, 즉 실패하게됩니다.

그러나 다시보면, 공화국 정부는 군부에대한 아무런 통제권이없다는것이 증명되기도한것이죠.

 

결국 군부는 민중의 지지를 받진 못했으나,

언제나 군부는 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릴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던거죠.

 

당시의 독일 민중은 좌익과 우익 둘 모두를 신뢰할수없을정도였습니다.

"허구한날 혁명과 반란으로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놈들!"

이라고 받아들여질수밖에 없었던것이죠.

 

심지어, 아직 여러분이 볼수있는 폭동이나 반란은 많이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의 실패와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의 해체이후에도

공산당 조직은 죽지않았습니다.

 

심지어 카프폭동이후 우익과 군부세력에 혐오를 보낸 민중들이

독일 공산당에 협력하게되는거죠.

 

심지어 1923년, 독일은 초 인플레이션을 마주합니다.

1차 세계대전 패배이후, 배상금을 상환하기위해

돈을 마구찍어낸것이였습니다.

 

돈을 마구 찍어내니 화폐의 가치는 떨어졌고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집니다!

 

심지어 다시한번 공산주의자들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봉기를 시작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는등 각종 봉기를 주도했는데요,

 

이전과는 달리 주요 인물들은 이미 죽거나 수감상태여서

빠르게 진압당하게 됩니다.

 

히틀러가 처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얼굴을 비추게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뮌헨 폭동의 히틀러

그는 뮌헨 폭동(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까지에 이릅니다.

 

일전에 글에도 설명드렸지만

 

그는 체포되었지만 "애국심이 동기였다" 란 사유로

단순 5년의 징역을 받고 9개월만에 가석방되는데요,

당시 9개월간에 그는 나의 투쟁이란 저서를 쓰게되고

 

독일 국민들에게 그는 애국적인 인물로 인식되기까지합니다.

 

기존의 독일 군부와는 멀었고,

독일의 극좌 세력과는 달리 혁명을 꾀하지도않았다는 이유로 말이죠.

 

이후, 1928년 일명 "황금의 20년대"가 발생합니다.

초 인플레이션의 독일을 위해 연합국들은

배상금을 경감하는 여러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잠시 경제가 안정되는 효과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뿐이였죠,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벌어지고,

석방된 히틀러와 독일 나치당은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제가 저번에 보여드린

히틀러의 집권과정에서 확인하실수 있으실겁니다!

 

히틀러는 정말로 선거로 당선된걸까요?

여러분은 히틀러를 생각하면 뭐가떠오르나요? 세계2차대전, 유대인 학살, 등등... 여러가지가 떠오르시겠지만 일각에선 "히틀러는 민주주의의 실패작의 대표적인 예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

moon0926.tistory.com

에서 자세히 확인하실수 있으실것같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응형